“노승복 개인전에 부쳐….”
--전시장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입구에 들어오면서부터 저쪽
벽까지 300여 개의 액자가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다. 사진은 마치 제단에 세워진 영정들처럼 검은
액자나 검은 천으로 된 리본으로 둘려있다. 무작위로 그러나 주의 깊게 배치되어 있는 무수한 사진 한 장 한 장의 얼굴들을
확인하는 것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전체가 깊은 어둠에 쌓인 전시 공간은 마치 수 많은 묘석이 세워진 거대한
무덤 군이다. 전시장은 조금 있으면 죽은 자를 보내거나 또는 그들의 혼백을 다시 불러내려는 의식이 벌어질 듯한 분위기로
술렁거린다.
직접적으로 은유적으로나 그가 죽음을 다루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가 노리고 있는 것은 죽음의 보편성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환기시키는 일이다.
죽음-의학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심신의 불가역적인 기능의 상실이나 정지를 의미한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다른
뉘앙스를 가진다. 저 세상에서의 다시 태어남, 현세에서의 헤어짐, 어둠으로의 매몰, 해방, 고향으로의 귀환…. 그러나
지역과 시간에 관계없이 우리는 죽은 자의 위치를 살아 있는 자보다 훨씬 신성한 자리에 놓는다. 그것은 엄숙하게 치러지는
장송의례나 지금까지 사후세계가 얼마나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해서 묘사되어 왔는가, 신화의 세계에서부터 일상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죽음에 대한 언설의 역사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사후의 세계에 사는 자들은 육체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병이 드는 일도 없고, 나이가 들면서 육체가 변형되거나 부패해서 결국은 소멸되어 버리는 공포로부터 영원히 해방되어있다.
살아 있는 육체를 불멸의 혼이 담기는 장소로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그 모습을 불변하는 것으로 사진이라는
시간의 포르말린 속에 영원히 담가 두려 한다.
전시당 바닥 가득 널려 있는 사진들 사이에는, 그 사진으로 찍힌 사람들의 육신인 일부인 머리카락이 훝뿌려져 있다.
마치 그들에게 바쳐진 제물처럼…. 머리카락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검을 영구히 수집해 둘 수는 없다. 머리카락은
말하자면 그 대용물이다. 죽은 자가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이나 몸에 지녔던 것, 그 중에서도 신체로부터 직접 잘라 낸
머리카락은 영성(靈性)이 깃들어 있는 성유물(聖遺物) 숭배다. 문화적인 상상력과 상징의 능력으로 그들은 죽은 자와
동일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광선에 의해서 물체를 본다. 전시장은 조명이 거의 죽어 있고, 바닥에 가득 깔린 사진군의 극히 좁은 범위만을
스포트 라이트가 비추고 있다. 광선은 그것이 닿는 모든 물체의 모습들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그런 요설스러운
광선의 볼륨을 최대한 절제함으로써 더욱 많은 것을 ‘보도록’ 만들고 있다. 눈을 떠서 볼 수 있는 것과 눈을 감음으로써
비로소 보이는 것 그 점에 있어서도 그의 계산된 치밀함이 드러낸다.
원하건 말건 인간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다. 분명 죽음에 이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자각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죽음은 엄연한 현실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관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분명 모순이다. 죽음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면서,
그러나 그 죽음을 향해서 종말을 알 수 없는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죽음은 육체의 붕괴와 의식활동의 소멸을 의미한다. 만일 영혼이 의식활동의 다른 이름이라면 사후에 영혼은 의식과 함께
소멸되고 마는 것일까.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사후 세계는 절대적인 허무로 떠돌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
우리의 경험적 생애 있어서의 그러한 무제한성, 미완결성, 무목적성의 허무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 그의
어두운 방은 ‘본다’라고 하는 특권적인 입장을 버리고 ‘사유’하도록 요구한다.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는 가족과 친척과 친구의 사진이나 오래 전에 타계한 가족 사진들로 거대한 모뉴멘트를 만든다. 사진의 평면은 꼴라쥬를
통해서 시간과 공간의 퍼스펙티브를 가진 입체물로 변환된다. 그는 그 공간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같은 높이로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삶의 절대적인 대립으로서의 죽음. 그러나 죽음은 가능성으로서 생명의 원리를 그 안에 이미 내재하고 있다. 처음과 끝이
맞닿은 영원한 원화 운동. 그것은 언제 어느 곳에서나 끝날 수도 있고 시작될 수도 있다. 대답은 처음부터 준비되어
있다. 그에게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죽음이라고 하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 아무도 그것을 회피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서 대놓고 얘기하거나
들여다보거나 표현하는 일은 터부로 인식되어 왔다. 그는 이런 델리케이트하고 어려운 문제에 손을 댄 것이다. 전시장
입구에서 서서 귀를 기울이면, 어딘가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낮고 무거운 목소리들이 웅성거린다. 그 웅성거림은 커졌다가
잦아들고 다시 커진다. 그 소리의 움직임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우리가 그곳에서 체험하는 것은 분명 하나의 짧은
죽음이다.
김 승 곤(사진 평론가) |